피치 조절

“학교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여기 있네요?”

 

“나야 뭐 시간 나는 대로 연습해야 되니까… 별일 없었어?”

 

저야 당연히 별일 없죠. 오늘은 무슨 곡이에요? 그는 말을 맺으며 유경의 근처로 다가와 익숙한 듯 근처 플라스틱 의자를 끌고 앉았다. 쇼팽, 녹턴 2번. 오늘은 이게 듣고 싶더라구. 그녀는 눈을 감고 얕은 심호흡을 한 뒤 건반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따금 조잘거리며 지나가는 학생들의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는 늦은 저녁이 되었을 즈음 적막을 깬 건 어느 알람 소리였다. 

 

“벌써 아홉 시네... 기다려 주느라고 수고 많았어.”

 

“근데요, 그렇게 연습하면 늘긴 해요?”

 

“... 뭐라고?”

 

그냥… 이렇게 매일 보고 있으니까 궁금했어요.

네 주제에 연습한다고 늘긴 하겠냐는 얘기가 아닌 건 안다. 내 성취도가 체감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런 말을 할 애가 아니라는 것도 일부러 의도를 담은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아는 거랑 받아들이는 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확실히 다른 문제였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기로 했는데 네 앞에서는 그게 참 어려웠다. 순간의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해서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면 할수록 비참해져 가는 기분만 들었다. 너는 연습이랄 것도 필요 없다는 사람이구나.

 

그래, 너한테 이해를 바란 적은 없었어. 그렇지만 그건 너무한 거 아니야…? 이래서 난 너 같은 애들이 싫었어… 아니야, 말실수했네 미안. 먼저 가볼게, 내일 보자.

저 말을 전부 내뱉은 건지, 아니면 그저 생각만 했던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네가 나의 노력을 알아주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어, 그치만 내 진심을 무시하면 안 되는 거였잖아. 홧김에 말실수를 해버렸다는 걸 깨닫고는 바로 사과를 했었다. 나는 너랑 같은 실수를 하지는 않을 거니까. 그렇지만 다시 보자는 건 진심이었어. 네 말에 상처받았을 뿐이지 네가 싫은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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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새벽부터 눈이 뜨였다.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건 실기 시험 때 말고는 드문 일이었는데. 평소 기상 시간보다 두 시간은 이른 시간이기에 다시 잠에 들까 싶다가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정신이 맑아져 버렸다. 여유롭게 아침 준비나 하자는 셈 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작 두 시간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닌데,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아침을 직접 만들어보았다. 식사 후 뒷정리까지 다 하느라고 집에서 나갈 시간을 못 맞춰 버스를 놓쳤고, 겨우 지각은 면한 수준으로 등교했다. 나는 늦게 나오려던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늦었던 거다. 

점심시간에는 이르게 내려갔다. 딱히 무슨 이유가 있던 건 아니고, 그냥 그러고 싶은 날도 있는 거니까. 일찍 먹고 가려고 했는데, 아는 인영을 본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못 들었으니까 나는 모르는 이야기로 남겨 두기로 했다.

오후에는 거의 교실에만 있었다. 잠깐 시간이 되어서 연습하러 가볼까 싶을 적마다 선생님이 부르셔서, 친구 숙제를 도와주느라, 읽고 싶던 책이 생각나서 나가려다 말았다. 오늘은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였다.

학교가 끝나고는 바로 집에 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피곤했으니까, 학교 숙제도 해야 하니까, 집에서 연습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참 핑계도 많았다.

 

그로부터 며칠이나 지났을까. 네가 한 말은 내 주위를 맴돌아 계속 나를 괴롭혀왔다. 잊을 법하면 떠오르고, 지울 만하면 상기됐다. 이는 내 성정이 덜 자란 탓도 있겠지만, 이미 네가 나의 일상에 너무 많이 들어차 버려서, 큰 조각을 덜어내니 허무한 느낌이 쉽게 가시질 않더라. 많은 뜻을 담은 건 아니라지만, 나는 그릇을 바다에 빠뜨리지 못해서 자꾸만 천장에 닿아. 

지나간 일은 잊으면 그만인데 자꾸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래서 한동안 연습을 못 했어. 그치만 고작 어릴 적 감정에 삶의 방향을 놓으면 안 되겠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렇게 쉽게 그만둬서는 안 되는 거지. 

 

나는 다시 피아노 연습을 하기로 했다. 되든 안 되든, 시간을 메울 무언가가 절실했다. 내 삶에 갑자기 생겨버린 공허를 부정하고 싶었다. 이렇게 쉽게 사라져 버릴 줄 알았으면, 

근데 네가 뭐라고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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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교실에서 밖을 내다볼 때면 네가 보였다. 너만 보였다. 별 의미는 없다. 그저 아는 사람이 적을뿐이라서, 네 키가 조금 더 큰 편이라서, 해사하게 웃는 게 예뻐 보여서, 어쩌면 주인공이 독백이라도 하는 양 홀로 빛나는 게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듯 이목이 끌려서… 아니야, 그냥 하필 내 시선에 네가 걸렸을 뿐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할 거야.

잠깐 내다본 시선을 도로 거두고 교과서를 바라봤다. 흰 종이 바닥에, 까만 점들을 괜히 이어 보았다.  잠을 덜 자서 그런가, 유독 집중이 안 되는 것 같네. 억지로 글자를 읽으며 수업을 쫓아 가려고 노력했다. 공부라도 잘해 둬야 하니까, 한 단어라도 더 외우려고 아는 낱말을 괜히 끄적여봤다. 그때였을까, 환호소리와 함께 네 이름을 연호하는 게 들렸다. 확실한 음절의 석 자였다. 

너는 불협화음 같은 사람이었다. 내 선율에 쓰여질 리 없는 독단적인 음표였다. 그런 주제에 이음표를 타고 홀로 악센트를 찍는 네가 있기에 완성되는 곡이다. 특별할 수밖에 없고, 이끌릴 수밖에 없는 너는 그렇다고 불필요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박자표에도 그이지 않는 꾸밈음 정도일까. 

부족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어떤 기분일까. 되어본 적 없으니 가늠도 되지 않는다. 네가 가진 재능이 노력의 산물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절대 닿을 수 없는 경지에 네가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 내 손에 쥐지 못한 너를 잃는 것이 필연은 아닐 테니까. 

 

못하는 게 없다더니 너한텐 세상이 다 쉽겠다. 쳐올린 공을 펜스 너머로 보내는 것도, 절대 내어주지 않으리라 다짐한 선도 쉽게 넘어 다니니 못 갈 곳이 없겠다. 나는 단 한 번 옆자리를 내어준 것만으로도 이렇게 심란한데, 너는 내 생각도 안 나나 보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는 왜 나 없이 잘 지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본문이라도 읽었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단조롭고 정적인 일이니까. 그러나 본문에 쓰인 문구를 읽는 순간 나는 큰 파장으로 동요했다. 구절을 곱씹으려니  숨이 막히는 기분에 책을 덮어버렸다.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게 어떻게 사랑이야. 그건 그냥 생각하는 것뿐이잖아. 내가 원해서 떠올리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뿐이란 말이야. 만약 이딴 감정이 사랑이라면… 상상도 되지 않는다. 역시 해본 적이 있어야지 알지.

그래도 좋아하는 것을 갈구하는 감정은 안다.

내가 잘 하지도 못하는 피아노를 놓지 못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예고를 지망하는 마음은 사랑이겠지.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놓지 못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쉽게 돌아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나는 마지막으로 너를 보러 가려고 해. 이게 사랑일 리 없단 말이야.